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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규만의 심리칼럼] 하나님은 내 떡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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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9,918 등록일등록일: 2022-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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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장 26~ 31을 보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26)”,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31)”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 이 내용을 음미해 보면, 하나님은 태초에 “관계 속”에서 인간을 창조하셨고 이러한 창조물을 보니 즐겁고 좋았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인간과 관계를 맺고 싶어 하시고,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을 때, 즐거움과 편안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도록 사전에 프로그램화된 존재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까?


예수님이 모든 율법을 한마디로 요약해서 주신 말씀에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너 자신 같이 사랑하라(눅 10장 29절)”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의 의미는 자칫 인간은 “하나님과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들릴 수 있지만, 자세히 보면, 이 말씀에는 하나님, 이웃, 자신의 3가지 주체가 등장한다. 즉 인간은, 하나님, 이웃, 그리고 나와의 3가지 관계 속에서 살고 있고 이 세 가지 관계는 서로 상호 연관이 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웃을 사랑하려면 먼저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하고 나와 긍정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친밀감과 애착 관계가 우선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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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인 기독교는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를 강조해왔다. 그러기에 기독교인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교회에 충성하고 교회에 헌금과 십일조도 열심히 하라고 강조하고, 이웃을 위해서 희생 봉사하고 구제하고 선교하라고 강조했다. 그 결과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면, 교회 출석, 성경 공부, 각종 헌금, 가족보다는 이웃 봉사에 지쳐있고, 주일에는 교회에 출석해서 다른 성도 앞에서는 미소와 웃음을 짓는 천사의 얼굴을 보이지만, 교회를 나서는 순간 교회 활동과 인간관계에서 받은 상처 실망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가정에서는 해결되지 않은 부부 갈등, 자녀와의 문제로 심한 고통을 받고 있으며, 필자가 한국과 미국에서 기독교인들을 상담한 결과에 의하면 교회 활동하면서 받은 스트레스를 술과 성적인 일탈로 푸는 경우가 많았다. 3가지 관계 중 어디에서 잘못되었을까? 


필자가 보기에는 위 3가지 관계가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한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그동안 전통적인 기독교는 교회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를 강조했지만, 나 자신과 자기와의 관계는 상대적으로 덜 강조하기에 내가 나를 잘 모르는 부작용으로 기독인들은 이중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성경은 여러 번 나와 나와의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즉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태: 5장 8절)”라고 했는데, 우리 마음이 오염되어 있으면 오염된 하나님을 보고 진리의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의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고 형제의 눈의 티를 뺄 수 있다. 또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웅덩이에 빠진다.” 등의 하신 말씀을 보면 나의 심리적인 블라인드 영역, 나 자신의 문제, 나의 약점, 나의 심리적인 역동을 파악해야 타인의 문제를 바로 보아야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정상적으로 유지 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즉 나에 대한 성찰과 나에 대해 알아차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intrapsychology)를 다루는 것을 성격심리학 또는 인성 심리학이라 부르고, 나와 타인과의 관계(interpersonal psychology)를 다루는 것을 사회 심리학이라 부른다. 그런데 사회 심리학의 많은 이론을 보면,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가 타인과의 관계에 영향을 주고,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는 부모와의 어린 시절 경험한 애착 관계에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즉 인간은 어린 시절 태어나서 경험하는 부모 특히 엄마와의 대상 관계가 중요하고 이러한 대상 관계는 일생을 통해서 대인관계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신앙생활에서 강조하는 영성의 본질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규정할 수 있는데, 영성 역시 초기의 부모와의 대상 관계가 영향을 준다는 것이 영성에 관한 핵심적인 연구 결과이다. 하나님의 본질은 진리와 사랑이라고 설명하는데, 어린 시절에 부모로부터 사랑에 대한 체험을 못 했거나, 정의로운 대접을 받아 본 경험이 없으면, 아무리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설명해도 마음속에 와 닿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필자가 상담했던 미국 여성은 하나님에 대해서 두렵고 엄격하고 실수하면 벌을 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알고 보니 이 여성은 어린 시절에 알코올 중독 아버지 슬하에서 심리적 신체적 학대를 받고 성장해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분이었다. 또한 필자가 신학교 석사 과정에 있는 학생들을 상대로 집단 상담하면서 어린 시절 부모에 대한 이미지와 현재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와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가를 탐색하도록 한 결과 많은 참가자가 부모님과의 애착 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고했다. 참가자들은 이러한 점을 알아차리고, 집단 상담을 통해서 하나님의 수용과 인정과 은혜를 경험하고 하나님과 친밀감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 부모와 사랑의 관계를 체험하지 못한 분들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예수님의 성품을 체험하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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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 즐거운 관계를 맺고 하나님 안에서 편안함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까? 예수님은 자신과 이웃과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었고, 관계의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셨을까?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의 시험을 통해서 검증을 받으신 장면이 나온다. 


첫 번째 시험 상황은 예수님이 사십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시고 음식을 극도로 굶주린 상황에서 마귀의 도전으로 시작됐다. 우리는 한 끼만 굶어도 배고픔에 허기를 느낄 수 있고, 하루를 굶으면 음식이 눈앞에서 아른거리고 일주일 정도 굶으면 모든 것이 음식으로 보이거나 없는 음식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아른거리는 환상을 본다.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님도 40일을 굶은 상태이었기에 얼마나 배가 고픈지 상상조차 하기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마귀는 이러한 예수님의 약점을 파고들면서 아주 평범한 질문을 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능력이 있으니까 광야의 아주 흔하고 보잘것없는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라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예수님의 눈에는 돌이 떡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 수많은 돌 몇 개를 떡으로 먹은들 자연 손상을 가져오는 것도 아닌데, 예수님은 왜 마귀의 요구를 거절했을까? 단지 마귀가 한 요청이었기에 상식적인 것조차 억지로 거절하셨을까? 


 1. 첫째 광야 시험에 대한 분석과 인간의 근본적 관계  


첫째: 예수님의 첫 번째 시험을 많은 설교자가 하나님을 돈이나 생존 문제 또는 경제문제 해결에 우선하여 생각하라고 해석하는 것을 보았다. 지금 예수님은 배고픔에서 오는 생존의 문제를 절박하게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부닥쳐 있기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돌로 떡을 만들어 먹은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에 영향을 줄까? 그리고 우리가 배고프고 굶주린 상황에서 처해 있으면 하찮은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은 것이 죄가 될까? 


둘째: 마귀는 예수님에게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을 능력이 있는가를 증명해 보이라는 예수님의 능력에 관한 시험을 했을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죽은 사람도 살리시는 능력을 보여주셨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보면, 돌로 떡을 만드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셋째: 마귀 시험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면서 거절했고, 마귀는 더는 토를 달거나 논쟁하지 않고 물러섰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마귀에서 무슨 메시지를 전달했기에 마귀는 이 시험에서 물러섰을까? 이 내용의 핵심은 무엇일까? 


넷째: 필자는 마귀의 첫 번째 시험의 핵심은 예수님이 육체적으로 배고픈 상태에서 돌과의 대상 관계를 하찮은 돌이라도 돌을 돌로 보는 것이 아니고 내 굶주림을 해결할 수 있는 떡이라는 대상 관계를 맺으라는 유혹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만일에 예수님이 이 시험에 응했다면 예수님은 자신의 필요성에 따라서 모든 대상과 수단적인 대상 관계를 맺었을 것이고, 예수님 역시 에덴동산의 아담처럼 실패했을 것이다. 마귀의 시험의 핵심은 선악과를 하나님과 같이 되는 수단인 아담의 떡으로 보라는 것이었다. 


마귀의 시험에 대한 예수님의 해답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이고, 믿음의 관계가 우선이기에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튼튼하고 친밀한 관계가 되면 인간의 모든 대상 관계가 해결될 수 있다는 메시를 보내신 것이라고 본다. 즉 예수님은 돌을 포함한 우리의 모든 대인관계를 하나님과의 대상 관계에서 해결할 때 완전히 해결될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선교 과정에서 세상의 왕의 되어 달라는 유혹, 종교 지도자들의 핍박, 심지어는 십자가의 고난도 하나님과의 완벽한 신뢰와 애착과 친밀한 대상 관계를 통해서 극복하셨다.


2. 광야의 첫 번째 시험의 의미와 나의 대상 관계에 대한 적용


예수님이 첫 번째 시험을 받으신 조건을 보면, 신체적으로 굶주리신 상태인데, 나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우리는 때로는 신체적일 굶주림이 있지만, 심리적으로도 많이 굶주린 상태를 항상 경험하고 있다. 즉 성장 과정에서는 부모의 애정과 인정, 현재는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인정과 수용에 굶주린 상태에 있을 수 있고, 자신을 성취하고 싶은 욕망 또는 지배욕에 굶주릴 수도 있다. 이러한 심리적 배고픔과 결핍에 대한 예수님의 해결책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하나님은 내 떡인가? 이러한 입장에서 기독교를 믿는 신앙인은 하나님을 통해서 내 뜻과 소망을 이루기 위한 내 떡으로 보면서 믿는 사람들이다. 소위 말하는 기복적인 신앙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떡이 될 분도 아니고 인간에 의해서 조정 당하실 분도 아니다. 하나님은 진리와 사랑의 인격적인 존재이시고,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에서 친밀한 관계를 원하신다. 예수님을 통해서 병을 고치고 빵을 구하는 대상 관계를 추구했던 유대들은 자신이 원하는 떡을 예수님에게서 받은 후에 예수님을 떠났고, 심지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자리에서 예수님을 저주하기까지 했다. 예수님은 우리와 대상 관계를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로 우리가 한순간도 하나님과 친밀감에서 멀어지면 우리는 영적으로 사망하는 관계가 된다고 설명하셨다. 즉 하나님과 우리는 진실하고 순수한 친밀하고, 한순간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지 우리의 신체적, 심리적 영적인 욕구를 채우는 내 떡과 같은 대상 관계는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내가 천당 가기 위한 내 떡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을 어떤 대상으로 믿는지 하나님에 대한 내 자신의 신앙적 자세의 검토가 필요하다. 하나님에 대한 떡 타령을 중지해야 한다. 


둘째: 교회의 공동체는 내 떡인가? 교회를 내 떡으로 보는 사람들은 교회 생활을 통해서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동기가 강한 사람들이다. 즉 교회에서 희생 봉사하는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는 주위 사람들에 대한 인정의 배고픔에서 그들의 인정이 주는 떡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이러한 사람들은 내면적으로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에 굶주려 있고 이것이 채워지지 않으면 실망한 나머지 이 교회 저 교회를 통해 떡을 사냥하고 다니는 사람들이다. 교회는 우리의 생활 공동체이기에 상대방이 나와 다름을 인정하고, 우리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님께 인정받고 수용 받는 것이기에 교회 생활하면서 상대방을 내 떡으로 보지 말고, 상대방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상대방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서로 시기하지 않고 항상 하나님의 영광과 인정을 추구해야만 한다. 이러한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교회에 다니는 부작용과 상처를 경험”한다. 하나님과 관계를 떠나서 한 교회 봉사, 선행이나 헌금은 울리는 꽹과리 같은 헛되고 헛될 뿐이다. 목회자는 교인들을 자신의 목회를 위한 떡으로 여겨서는 안 되고, 교인들은 목사님을 내 인정 욕구를 충족해 줄 내 떡으로 봐서는 절대 안 된다. 이제 교회 안에서 떡 타령이 그쳐야 한다. 


셋째: 배우자는 내 떡인가? 필자는 부부 상담을 40여 년 넘게 해 오고 있는데, 상담 초기에 상대방의 어떤 점이 좋아서 결혼하게 되었는가를 물어보면, “상대방이 착해서, 나를 편하게 해주어서, 결단력이 있어서, 부모에게 잘해 줄 것 같아서, 예뻐서,” 등등을 말하는데, 막상 결혼이라는 뚜껑을 열어 보니 실망했다고 하면서 갈등이 시작되는 경우를 종종 목격했다. 즉 상대방이 내 떡이 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오히려 상대방이 나를 떡으로 이용하려고 해서 못 살겠다는 것이다. 배우자가 나를 통해서 더 풍성한 삶을 살 수 있게 하려고 결혼했다는 답은 이제껏 들어 보지 못했다. 부부는 내 욕구를 충족해 주는 내 떡의 관계가 아닌, “인격적인 관계”이고 상대방을 수용하고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부부 관계의 본질은 하나님이 성육신하신 것처럼, 남편이 아내가 되어 보고, 아내가 남편이 되어 보는 관계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내가 예수님 안에 있는 것처럼 내가 아내와 남편 안에 서로서로 안에 거하면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부부 관계에서 떡 타령을 중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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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나 자신은 나의 떡인가? 이러한 질문이 가능한 것인가를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는데, 자신을 자신의 욕망을 이루는 수단으로 보는 사람들은 자신이 자신의 기대에 못 미쳐 자신을 심리적으로 공격하면 우울증이고, 자신을 신체적으로 공격하면 자해이고 자살이다. 예수님은 인간을 바라볼 때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고 우리 인간의 연약함을 수용하고 인정하고 격려하시는 분이다. 예수님이 이처럼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격려해 주시니까 나도 나를 수용하고 내가 나를 격려해 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내가 내 욕구를 실현하지 못한 떡이 되었을 때, 내가 나를 정죄할 권리가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나의 모든 결점, 실수에 대한 대가를 치르셨기 때문이다. 


내가 예수님이 나를 사랑해 주시는 것처럼 내가 나를 사랑해야 내 배우자, 내 가정, 내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은 배에서 강같이 내면에서 채워져 있어야 밖으로 흐를 수 있는 것이다. 나 역시 내 욕망을 이루는 내 떡으로 보지 말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께 소중한 인격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나에 대한 떡 타령을 중지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심리적 굶주림이나 신체적 영적인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서 상대방을 내 떡으로 보고 싶은 본능적인 유혹이 있는데, 이에 대한 예수님의 해답은 인간의 배고픔 갈증, 결핍은 자연스럽지만, 하나님과의 수용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을 때 평안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나와 나, 나와 이웃,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틀어져 있거나 조화가 안 되면 불안과 우울과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우리의 부정적인 정서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근본적인 관계에 문제가 있으니까, 모든 대상 관계들을 구조 조정하고, 재출발하라는 경고이고 신호등이다. 진정한 기독교인이 된다는 내가 누구인지 깨달아 아는 어려운 과정이기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매일 정진해야 한다. 나 자신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이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내 떡으로 보는 대상 관계가 아니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대상 관계를 통해서 보아야 한다. 


채규만. 열린 사이버대학교 상담 심리학과 석좌교수, 성신여대 심리학과 명예 교수, 한국 및 미국 임상심리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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