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 끝에 낙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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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4,840 등록일등록일: 2007-10-10본문
고생 끝에 낙이 온다 누구보다 창업에 절실한 사람이 있다. 결혼 후 전업주부로만 생활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남편을 잃고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경우, 어려운 가정환경을 극복하고 창업에 도전하는 사람, 자신이 원하던 일을 포기하고 제2의 인생을 꿈꾸는 사람, 사업에 손댔다가 몇 차례 실패한 사람이라면 두려운 마음이 더욱 앞설 것이다. 이 같은 아픔을 딛고 불굴의 의지로 성공을 이뤄낸 사례가 있다. 이들은 모두 뼈아픈 경험을 하고 성공의 열쇠를 거머쥐게 된 경우다.
남편과 사별, 홀로서기 성공
“이제는 저 혼자 모든 걸 해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 뿌듯해요” 7년 전 인생의 가장 큰 역경을 겪었던 양승희(41・크레빅 평택점・www.crebig.com) 씨. 양씨는 교통사고로 남편과 사별한 뒤, 지금은 큰옷 전문점을 운영하며 두 아이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결혼 후 전업주부로만 생활하던 양씨에게 남편의 사고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폭풍에 양씨는 마음을 추스릴 여유도 없이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남편의 교통사고 후 보상금이 나오긴 했지만, 사업을 하던 남편의 빚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고 아이들과 함께 지낼 생활비도 절박한 상황. “남편이 있을 때는 남편이 다 알아서 했기 때문에 든든하고 걱정이 없었어요. 일단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마음만은 편했었죠. 그러나 남편이 떠나고 난 후 내가 다 해야 한다는 생각에 막막하기만 했어요.”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양씨는 곧바로 동네 약국에 취업해 처방전 입력하기, 약 정리 등의 일을 하게 됐다. “적극적으로 뭔가를 알아보거나 하는 성격도 못되고 딱히 갈만한 곳도 마땅치 않아 계속 약국에서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약국에서 일 하는 걸로는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기가 버거웠어요. 창업을 생각하고 있던 찰나에 아무것도 모르는 저에게 약국에 계신 분이 조언을 해 주셨죠.” 창업에 대한 조언을 듣고 양씨는 인터넷 등으로 정보를 알아본 후 지금 운영하는 옷 가게 본사에 가 설명을 들은 후 바로 결심을 하게 됐다고. 이렇게 해서 양씨는 창업비 9천만원을 들여 2005년 5월 큰옷 전문점을 오픈하게 됐다.
준비되지 않은 창업으로 불안한 마음이 컸던 양씨는 단골 고객이 생기면서 차츰 자리를 잡아 지금은 월1800만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과연 내가 잘 할 수 있을까...떨리기도 하고 자신감도 없었어요. 무엇보다 투자비를 그냥 날려버리진 않을까 가장 두려웠습니다.” 처음에는 손님들에게 옷도 권해주지 못했지만 이제는 단골손님들과 친구처럼 지낸다는 그녀. 그녀의 꿈은 앞으로 더 열심히 일해서 점포를 확장해 다른 매장처럼 직원도 채용하고 매출도 높여 두 아이들과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부부가 와서 옷 살 때 부럽기도 하고 참 보기 좋더라고요.”하고 말하는 그녀는 사별의 아픔을 이겨내고 이제는 당당한 사업가로서 힘찬 날갯짓을 하고 있다.
한부모가정의 아픔 딛고 소자본창업으로 성공한 젊은 사업가
한부모가정의 아픔을 딛고 사업전선에 뛰어 들어 소자본창업에 성공한 청년이 있다. 경상남도 울산에서 광고 전문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장지현(27・이데아 울산지점・www.ideaad.co.kr) 씨. 고2때 지병으로 투병하던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단둘이 생활해야 했던 장씨는 어머니께 용돈을 받아쓰는 것이 미안해 하루빨리 돈을 벌어야겠다는 일념 하에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는 군 제대 후 홈페이지 제작사에 들어갔지만 사정이 어려웠던 회사에서는 몇 개월이 지나도록 월급이 나오지 않아 회사를 그만두고 동종업계로 이직을 했다. 하지만 사정은 매한가지. 그 곳에서도 역시 회사가 어려워 1년 넘게 월급을 못 받아 라면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다. 그렇게 계속 힘든 생활을 하던 중 동고동락을 함께했던 동생이 우연히 광고대행사의 창업주 모집광고를 보고 사업제안을 했다. 기존의 광고와 다르게 새로운 방식의 접이식 광고판이 바로 그 것. 화이트보드판으로 만들어진 접이식 광고판은 냉장고 등에 붙여 놓고 메모판으로 사용할 수 있으며, 보드판을 접으면 인근의 배달점 등의 광고가 게재돼 있다. 실용적인 면에서 다른 광고업체에 비해 경쟁력이 월등히 앞선다고 생각한 장씨는 주저하지 않고 바로 결심, 2006년 6월 창업비 1천만원을 들여 광고전문 회사를 오픈했다.
“광고를 하기 위해서는 전단지가 필요하지만 소비자들은 받기 싫어하잖아요. 꼭 필요하지만 지저분해서 안 받는 전단지를 실용적으로 제작한 아이템에 시장성이 있다고 판단되었습니다. 동생의 제안이 아니었다면 지금도 어떤 고생을 하고 있을지 몰라요.” 본사의 지속적인 지원과 교육으로 지금은 영업 노하우도 많이 생겼다고. “처음엔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 힘들기도 했지만, 지금은 광고주들과 농담도 주고받으며 즐기면서 일하고 있습니다.” 월급도 못 받으며 직장생활을 하던 그가 뜻밖의 사업을 시작해 지금은 월1500만원이라는 매출을 달성, 노력한 만큼의 성과를 톡톡히 맛보고 있다.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에게 못 당하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한테 못 당한다’는 말을 머릿속에 항상 되새기며, 장씨는 오늘도 발에 땀이 나도록 열심히 뛰어다닌다.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수에서 사업가로 변신!!
원하는 분야에서 성공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때로는 인생의 전환점이 필요하다. 음악활동만 하다가 몇 번의 좌절 끝에 인생의 향로를 바꿔 숯불돼지갈비전문점을 운영하게 된 박용준(40・스카이돈 조원동점・www.skydon.co.kr) 씨. 중학교 시절부터 그룹사운드 활동을 했던 박씨는 군 제대 후 기타리스트로 밴드에 들어가 음반을 발표하고 가수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연예계라는 곳이 그리 호락호락 한 곳이 아니었다. 공개방송을 하던 중 장비에서 심한 잡음이 나는 등 방송사고가 잇따르자 방송정지 처분을 받았던 것. 신인으로서는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로인해 가수활동을 접은 박씨는 클럽에서 공연도 하고 주자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등 밤낮으로 일했다. 하지만 원하지 않는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수입이 적어 힘들었다고. 그러던 중 98년도에 박씨에게 뜻하지 않은 행운이 찾아왔다. 당시 유명 가수들을 배출했던 기획사에서 러브콜을 받았던 것. 다시 한 번의 음반 제작 기회가 생긴 박씨는 기대에 부풀었다. 그러나 그 기대도 잠시. 락 음반을 제작하기로 하고 들어갔지만, 락은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대중음악으로 가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크게 실망을 한 박씨는 음반 제작을 포기하고 로드매니저 활동을 시작했지만 경기가 안 좋아지면서 타격을 입고 모든 연예계 활동을 접었다.
그 무렵, 박씨는 본인의 열렬한 팬이었던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 하게 됐고 가장으로서 고정적인 수입이 절실히 필요했다.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먹는장사라고 생각한 박씨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8개월 동안 시장조사를 했다. “저렴한 고기집을 하려고 시장조사를 시작했는데 막상 돌아다녀 보니 가격이 저렴한 건 맛이 떨어지더군요. 역시 ‘싼 게 비지떡’이라는 생각에 마음을 접으려고 했었어요.” 그러던 중 친구의 전화를 받고 급하게 달려간 그 곳. 바로 박씨가 지금 운영하고 있는 점포의 본점이었다. “친구의 말을 듣고 찾아 간 그 곳은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1인분에 3300원인 갈비가 일반 7000~8000원짜리보다 맛있었거든요. 바로 그 자리에서 이 장사를 해야겠다고 마음의 결정을 했죠.” 자금이 없어 대출을 받았지만 그래도 자금이 부족했던 박씨는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원래 생각했던 평수를 50평으로 줄이고, 나머지 모자르는 부분은 본사에 부탁해 오픈 후 다음 달에 바로 갚았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박씨는 2005년 11월 숯불돼지갈비전문점을 오픈하고, 현재 월 6천만 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며 지금은 어엿한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처음에 고생 많이 했죠. 음악만 하던 사람이라 운영을 제대로 못해 본사에 문의도 많이 했어요. 2~3개월 지나다 보니까 돈이 보이더군요. 지금은 상당히 안정권에 들어가 있는 상태입니다. 세금이 많이 나와서 걱정이에요.” 간혹 동요를 편곡해 CD로 만들어 아이한테 들려준다는 박씨.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만은 아직도 식지 않았다.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나 실패, 또 실패, 반복되는 실패라도 한우물만 파다보면 성공으로 가는 길의 이정표가 나타난다.
고등학교 졸업 후 주경야독으로 컴퓨터 기술을 습득한 이상길(34・컴닥터119 수원시청점・www.comdoctor119.com) 씨. 어릴 때부터 컴퓨터를 좋아했던 이씨는 대학 졸업 후 객지생활을 시작하며 컴퓨터 업체에 취직을 했다. 이후 통신사 외주업체로 사업을 시작했다가 수입이 형성되지 않아 6개월 후 접을 수밖에 없었다.
1년 동안 후유증을 안고 있었던 이씨는 날아간 투자비용보다는 무엇보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과연 내가 사업에 소질이 있는가 하는 회의감에 빠져들었었죠. 사업 실패에 대한 충격으로 4~5년 동안 사업할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낙담만 하고 있을 수는 없기에 어쩔 수 없이 다시 직장생활을 시작했던 이씨. 객지생활을 하면서 생활고에 시달리기도 했다. 라면으로 한 달을 버티는가 하면 만원으로 일주일을 견디기도 했던 것. 이씨는 4남2녀 중 막내였지만 자존심 때문에 형제들한테 손을 벌릴 수는 없었다. “지금도 형제들은 그때 제가 그렇게 어려웠었는지 몰라요. 전혀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거든요. 혼자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보고 싶었습니다.”
이씨는 직장생활을 하며 받은 월급에서 기본적인 지출 외 100%를 저축해 사업비를 마련, 또다시 사업에 도전했다. 프리랜서로 컴퓨터 수리를 했던 경력을 살려 개인상호로 컴퓨터 수리업을 시작하고 쇼핑몰도 함께 운영했다. 하지만 재택근무를 하며 혼자 하다 보니 큰 브랜드의 경쟁업체가 너무 많아 매출도 적고 힘들었다고.
역시 브랜드의 힘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낀 이씨는 프랜차이즈 쪽으로 눈을 돌려 지금의 컴퓨터 수리점을 운영하게 된 것. 그 결과 이씨는 월1000만원의 매출을 기록하고 있다. “계속되는 실패를 경험했기 때문에 이 사업을 시작하면서도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잘 된 것 같아 뿌듯합니다. 아무래도 신뢰도가 높고 전국적인 네트워크망을 확보하고 있어서 수월했죠.” 이씨는 특히, 서비스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로만이 아닌 몸소 실천하는 서비스와 기술력으로 고객만족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한다. 앞으로 그는 역세권 등 유동인구가 많은 곳으로 사무실 위치를 이전해 출장서비스위주에서 벗어나 내방고객을 유치할 계획이다.